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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위한 처방

2026. 7. 13. · 9,660자 · 약 11분

고요를 위한 처방 썸네일
17

유리 패널 위에서 빛의 입자들이 부유했다. 서유진은 손가락으로 입자들을 흩뜨렸다. 수억 개의 점이 손길을 따라 소용돌이치다 이내 새로운 형태로 응결했다. 실패였다. 의도했던 곡선이 아니었다.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돌출부가 사용자의 시선을 방해할 터였다.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업 전체를 쓸어버렸다. 빈 패널에 다시 어둠이 내렸다. 벌써 4시간째 같은 작업의 반복이었다.

새로운 인터페이스 시안 마감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클라이언트는 ‘혁신적이지만 안정적인’ 것을 원했다. 모순된 단어의 조합. 그 모순의 틈새에서 길을 찾는 것이 유진의 일이었다. 그녀는 다시 손을 뻗어 허공에 입자들을 불러냈다. 이번에는 더 느리고 신중하게. 머릿속의 신경망이 타오르는 감각. 아이디어가 형태를 갖추기 직전의 미세한 전율. 바로 그 순간, 작업실의 공기를 가르며 낮은 알림음이 울렸다.

패널 한구석에 녹색 봉투 아이콘이 깜빡였다. 국민건강조정센터에서 보낸 공식 통지였다. 유진은 하던 작업을 멈췄다. 이런 통지는 보통 정기 건강검진 안내거나 세금 관련 공지였다. 봉투를 열자 부드러운 서체의 문장이 떠올랐다.

[서유진 님, 축하합니다! 국가 양자두뇌 조기진단 프로그램의 정기 스크리닝 대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더 건강한 내일, 더 안정된 사회를 위한 발걸음에 동참해주세요.]

심장이 작게 내려앉았다. ‘선정’이라는 단어는 선택권이 없는 통보에 곧잘 쓰이는 말이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3년 전 도입된 이래, 모든 시민이 순차적으로 거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뇌의 양자 상태를 통째로 시뮬레이션해 치매나 정신질환 같은 잠재적 질병의 인자를 수십 년 전에 발견하는 기술. TV에서는 연일 그 효용성을 홍보했다. 덕분에 주요 신경질환 발병률이 10년 새 80% 넘게 감소했다고 했다.

통지서에는 스크리닝 절차가 간단하고 고통이 없으며, 30분이면 끝난다고 적혀 있었다. 예약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는 다음 주 화요일이었다. 유진은 잠시 망설이다 확인 버튼을 눌렀다.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동체의 건강에 기여하는 시민의 당연한 의무. 그렇게 모두가 이야기했다.

일주일 뒤, 유진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조정센터에 앉아 있었다. 내부는 병원보다 고급 스파에 가까웠다. 부드러운 조명, 나지막한 클래식 음악, 공기 중에 분사되는 편안한 향. 모든 것이 방문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세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름이 불리자, 유진은 안내를 따라 스캐닝실로 들어갔다.

방 중앙에는 거대한 흰색 고리 형태의 기계가 있었다. 위압적이기보다 조각품처럼 보였다. 안내원은 유진을 기계 아래의 안락의자에 앉히고는 이마와 관자놀이에 작은 센서 몇 개를 붙였다. 차가운 겔의 감촉이 낯설었다.

“잠시 수면 상태에 드시게 될 겁니다. 아주 편안한 경험일 거예요. 좋은 꿈 꾸세요.”

안내원의 목소리를 끝으로 의식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색과 빛이 뒤섞인 터널을 지나는 듯한 감각. 그게 전부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다른 방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몸은 개운했고, 막 낮잠에서 깬 듯 나른했다. 창밖으로는 잘 가꿔진 정원이 보였다.

“서유진 님, 검사는 잘 마치셨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의 하얀 가운 위 명찰에는 ‘박선우, 인지 조화 상담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유진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건넸다.

“결과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유진 님은 매우 창의적인 두뇌 활동 패턴을 가지고 계시네요.”

박선우는 앞의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테이블 표면이 스크린으로 변하며 유진의 뇌 활동을 시각화한 3D 이미지가 떠올랐다. 수천 개의 빛나는 선이 복잡하게 얽혀 은하수처럼 보였다. 아름다웠다.

“보시는 것처럼, 유진 님의 전두엽과 측두엽 사이의 신호 교환이 평균보다 37% 활발합니다. 보통 예술가나 연구자들에게서 보이는 패턴이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능력과 직결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칭찬하는 투였지만, 유진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자신의 머릿속이 벌거벗겨진 채 전시된 기분이었다.

“다만… 몇 가지 관리하면 더 좋을 패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박선우가 화면의 한 부분을 확대했다. 은하수 한가운데에 유독 밝게 빛나다 못해 파직거리는 성운 같은 영역이 나타났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여 불안정한 느낌을 주었다.

“이 부분을 저희는 ‘과잉 연산 루프’라고 부릅니다. 특정 자극에 대해 과도하게 많은 가능성을 탐색하고, 기존의 해결책을 거부하며, 비효율적인 경로를 고집하는 경향을 보이죠. 사회적 규범이나 일반적인 합의에 대한 내재적 저항 신호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붉은 영역을 가리켰다. 유진은 숨을 참았다. 클라이언트의 ‘혁신적이지만 안정적인’ 요구에 좌절하며 몇 시간 동안 결과물을 부수고 새로 만들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존 디자인을 따랐다면 벌써 끝났을 일이었다.

“이것이 질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해하시면 안 돼요. 어디까지나 ‘전조 증상’에 가깝습니다. 저희는 이걸 ‘인지적 비정렬 증후군, R타입’의 초기 단계로 분류합니다.”

“R타입이요?”

“Rejectionist. 거부형이라는 뜻입니다. 방치할 경우, 만성적인 불만, 권위 부정, 사회적 고립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인이죠. 생산성 저하는 물론이고요.”

박선우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고 상냥했다. 마치 혈압이 조금 높으니 식단을 조절하라고 권하는 의사 같았다.

“다행히, 아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유진 님은 저희의 ‘인지 조화 프로그램’에 최적합 대상자입니다. 아주 간단한 비침습적 음파 요법이에요. 2주에 한 번, 15분씩 석 달만 받으시면 됩니다. 이 불안정한 과잉 연산 루프를 안정적인 상태로 재조정하여, 불필요한 정신적 소모를 줄이고 집중력을 높여줍니다. 훨씬 평온하고, 효율적으로 사고하게 되실 겁니다.”

평온하고, 효율적으로. 유진은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어젯밤 그녀를 괴롭혔던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돌출부’가 떠올랐다. 그것은 비효율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치료를 받고 나면… 제 작업은 어떻게 되나요?”

“물론 더 좋아지시겠죠.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치료 후 클라이언트의 만족도가 크게 올랐다고 보고합니다. 불필요한 고집을 버리고, 더 명확하고 효과적인 결과물을 내게 되니까요.”

박선우는 환하게 웃으며 브로셔 하나를 건넸다. 표지에는 ‘고요를 위한 처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잔잔한 호수 이미지와 함께 ‘더 안정된 당신, 더 행복한 우리’라는 슬로건이 있었다. 브로셔 안에는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만족스러운 후기가 가득했다.

‘이제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으로 밤을 새우지 않아요.’

‘세상이 훨씬 단순하고 명쾌해졌어요.’

‘왜 그렇게 모든 것에 화가 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유진은 브로셔를 든 채 상담실을 나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박선우의 말에는 어떤 강요도 없었다. 모든 것은 유진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뇌에서 발견된 ‘비정상’은,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일부라고 여겼던 바로 그것이었다. 의심하고,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성향. 그것이 병의 전조라고 했다.

작업실로 돌아온 유진은 텅 빈 유리 패널 앞에 섰다. 그녀는 다시 손을 뻗어 빛의 입자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상담실에서 봤던 뇌의 이미지 속 붉고 보라색으로 타오르던 영역을, 그 불안정하고 거친 성운의 형태를 허공에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언처럼 보였다. 스스로의 결함을, 혹은 정체성을 긍정하는 행위. 그러나 그 형태는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유진은 그것을 오래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이미지를 지워버렸다. 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찌푸린 미간, 굳게 다문 입술. 박선우 상담사가 말한 ‘만성적 불만’의 표상과도 같았다.

그녀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다시 패널에 띄웠다. ‘혁신적이면서도 안정적인.’ 그 단어들이 이제는 조롱처럼 느껴졌다. 안정. 효율. 평온. 국민건강조정센터가 약속하는 모든 가치였다. 어쩌면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디자인이 아니라, ‘인지 조화 프로그램’을 거친 디자이너의 결과물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예측 가능하고, 사용자를 당황시키지 않으며, 정해진 규범 안에서 최적의 해답을 내놓는 디자인. 저항하지 않는 디자인.

“유진 씨, 아직도 작업 중이에요? 벌써 8시가 넘었는데.”

칸막이 너머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 동료인 민준이었다. 그는 이미 퇴근 준비를 마친 듯 가벼운 재킷 차림으로 커피 잔을 든 채 유진의 작업 공간으로 다가왔다. 그의 주변에서는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한 향이 났다. 그의 디자인처럼.

“아, 네. 시안이 생각대로 안 나와서요.”

“어디 봐요.”

민준은 유진의 어깨너머로 빈 패널을 들여다보았다.

“음,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이번 클라이언트가 좀 까다롭긴 하죠. ‘혁신’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는 경향이 있어요. 사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냥 세련된 안정감인데.”

민준은 업계에서 가장 빠른 디자이너 중 1명이었다. 그는 클라이언트의 숨은 의도를 귀신같이 파악했고, 단 한 번의 시안으로 프로젝트를 통과시키는 일이 잦았다. 그의 작업물은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웠다. 모두가 그의 효율성을 칭찬했다.

“선배는… 작업하실 때 막막한 적 없으세요? 하려던 게 계속 어긋나고, 완전히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어지는 그런 충동 같은 거요.”

유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 예전엔 그랬던 것 같아요. 3년 차 때까지는요. 쓸데없는 아이디어에 매달려서 마감 전날 밤새우는 일도 많았고. 근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다 부질없는 소모전이란 걸 깨달았어요. 중요한 건 내 예술 세계가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거니까. 핵심에만 집중하면 길은 명확하게 보여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하고 확신에 차 있어서, 유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브로셔에 적혀 있던 후기들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세상이 훨씬 단순하고 명쾌해졌어요.’

“얼마 전에 국가 스크리닝 받고 왔는데…”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운을 뗐다.

“혹시 ‘인지적 비정렬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셨어요? R타입이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민준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동질감을 느낀 사람의 표정이었다.

“아, 그거 받으셨구나. 진단 나왔어요? 저도 2년 전에 R타입 초기 진단받았어요. 그때는 좀 충격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인생의 전환점이었죠. 당연히 인지 조화 프로그램도 받았고요.”

“……어떠셨어요, 프로그램 받고 나서?”

“최고였죠.”

민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가리켰다.

“머릿속에 항상 껴 있던 안개가 싹 걷히는 기분? 예전에는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리면 수십 개의 곁가지들이 엉켜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거든요. 뭐가 좋은 길인지 판단도 안 서고. 지금은 아니에요. 가장 효율적인 경로가 내비게이션처럼 딱 보여요. 덕분에 작업 시간은 절반으로 줄고, 컨펌률은 200% 올랐죠.”

그는 유진의 책상 위에 놓인 ‘고요를 위한 처방’ 브로셔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집어 들었다.

“아직도 이 디자인 쓰는구나. 유진 씨도 꼭 해봐요. 두려워할 거 하나 없어요. 우릴 아프게 하는 비효율을 치료하는 거니까. 일종의 백신 같은 거죠.”

민준은 브로셔를 제자리에 곱게 내려놓고 유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마요, 유진 씨. 고민하는 그 시간도 다 ‘과잉 연산’인 거 알죠? 얼른 끝내고 퇴근해요. 내일 봐요.”

그는 상쾌한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텅 빈 공간에 다시 혼자 남은 유진은 아까 민준이 만졌던 어깨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곳이 차갑게 느껴졌다. 내비게이션. 가장 효율적인 경로. 불필요한 곁가지를 쳐내는 것. 그것이 민준의 비밀이었다. 유진이 지난 4시간 동안 수없이 만들어냈다가 부수기를 반복했던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돌출부’들은, 민준의 세계에서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유리 패널 앞에 섰다. 무언가를 그려야 했다. 혁신적이면서도 안정적인, 그 모순된 요구에 답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모든 빛의 입자들이 의심스러웠다. 이 아이디어는 창의성인가, 아니면 질병의 증상인가. 이 망설임은 신중함인가, 아니면 비효율적인 루프의 반복인가. 박선우 상담사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민준의 명쾌한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뒤섞여 이명을 만들어냈다.

유진은 눈을 감았다. 고요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가 마주한 것은 고요가 아니라, 자신의 뇌 속에서 여전히 붉고 보라색으로 불안정하게 타오르고 있을 이름 모를 성운의 소란스러운 침묵이었다.

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작업실의 제어된 공기가 폐부를 조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민준이 말한 ‘내비게이션’에 홀린 듯, 가장 안전하고 지루한 길을 선택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재킷을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밤의 도시는 거대한 회로 기판처럼 정교한 빛의 선들로 가득했다. 자율주행차들이 소음 없이 정해진 궤도를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모든 것이 완벽한 질서 속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유진은 자신이 불량한 부품이 된 것 같은 낯선 이질감을 느꼈다.

발걸음은 정처 없이 헤매다 낯익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고요서림’이라는 낡은 간판이 보였다.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전자책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고른 낡은 종이책을 파는 곳.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딸랑, 하는 낡은 풍경 소리와 함께 문을 열자 묵은 종이와 먼지 냄새가 그녀를 맞았다. 서점 주인인 노인이 두꺼운 안경 너머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서 오게.”

그녀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무질서하게 꽂힌 책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알고리즘의 개입 없이, 오로지 우연과 직감에 몸을 맡기는 탐색. 그녀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낡은 시집이었다. 『불온한 돌멩이』. 제목부터가 R타입의 선언문 같았다. 그녀는 책장을 넘겼다. 예측 불가능한 행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의 조합, 논리를 거부하는 이미지의 연속. 민준이라면 ‘비효율적 소통의 극치’라고 평할 터였다. 하지만 유진은 그 혼란스러운 문장들 속에서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뇌 속의 붉은 성운이 조용히 공명하는 듯했다.

“머리 아픈 책을 골랐군.”

어느새 다가온 주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눈은 유진의 손에 들린 시집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다들 쉽고 편한 것만 찾지. 요즘 세상은 복잡한 걸 병처럼 여기니까.”

그의 무심한 한마디가 유진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병이면… 치료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노인은 대답 대신 먼지 쌓인 책등을 손으로 쓱 훑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모든 길을 반듯하게 펴버리면, 그늘에서 쉬어갈 곳이 없어지는 법이라네.”

그는 더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유진은 시집을 가슴에 품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늘에서 쉬어갈 곳’. 그녀가 지난 4시간 동안 만들고 부수었던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돌출부’는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효율의 관점에서는 쓸모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잠시 머물러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 작은 그늘. 시집의 거친 표면이 손끝에 기분 좋게 와 닿았다.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세상에는 단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희미한 위안을 얻었다.

서점을 나선 유진의 뺨에 차가운 밤공기가 스쳤다. 도시는 여전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빛나고 있었지만, 이제 그 완벽한 질서가 전처럼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손에 들린 시집, 『불온한 돌멩이』의 거친 표면이 낯설면서도 위안을 주었다. 길가에 반듯하게 깔린 보도블록 사이, 아주 작은 틈을 비집고 피어난 이름 모를 잡초 한 포기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결코 신경 쓰지 않았을 풍경이었다.

사무실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 위에 낡은 시집을, 빛을 뿜는 유리 패널 바로 옆에 놓았다. 마치 두 개의 다른 시대, 두 개의 다른 세계관이 그 작은 책상 위에서 위태롭게 공존하는 듯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다시 국민건강조정센터의 통지서를 화면에 띄웠다.

‘인지 조화 프로그램 예약하기’. 부드러운 녹색 버튼이 그녀를 유혹했다. 민준의 확신에 찬 얼굴, 박선우 상담사의 상냥한 미소, 브로셔의 평온한 호수가 차례로 떠올랐다. 고요를 위한 처방. 그들은 모두 유진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더 행복하고, 더 안정된 삶을 위해서라고.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고뇌를 덜어내고, 명확한 길을 따라 걷는 삶은 분명 편안할 터였다.

하지만 노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모든 길을 반듯하게 펴버리면, 그늘에서 쉬어갈 곳이 없어지는 법이라네.’ 그늘. 그녀가 만들다 부숴버렸던 거친 돌출부. 비효율적이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 사회가 규정한 규범에 대한 내재적 저항 신호. R타입. Rejectionist.

그것은 병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불완전하고, 때로는 비효율적이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항하는 자기 자신. 그 혼란스러운 붉은 성운이 없었다면, 그녀는 애초에 ‘혁신적이지만 안정적인’이라는 모순된 요구 앞에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민준처럼, 클라이언트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가장 안전한 길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녀의 디자인일까. 아니, 그녀의 삶일까.

예약 버튼 옆,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글씨로 ‘치료 보류 및 거부’ 링크가 있었다. 유진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링크를 눌렀다.

페이지가 바뀌며 거부 사유를 입력하는 창이 떴다. 필수 입력 항목이었다. 그녀는 이 시스템이 거부하는 소수의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하고 분석할지 잠시 상상했다. 그녀의 거부는 또 다른 형태의 관리 대상이 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키보드 위로 손을 가져갔다.

[사유: 인지적 비정렬 상태를 현재의 정체성으로 유지하고자 함.]

엔터 키를 누르자, 화면에 차가운 확인 메시지가 떴다. [처리되었습니다. 귀하의 선택은 존중되지만, 관련 데이터는 향후 사회 안정성 분석에 참조될 수 있습니다.] 존중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서늘한 경고. 유진은 그저 화면을 닫았다. 놀랍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을 시끄럽게 채우던 이명이 사라지고, 진짜 고요가 찾아온 기분이었다. 그것은 외부에서 주입된 평온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얻어낸 단단한 침묵이었다.

유진은 텅 빈 유리 패널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빛의 입자들이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떠올리지 않았다. ‘혁신’이나 ‘안정’ 같은 단어들도 지워버렸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파직거리며 타오르던, 아름답고 불안정한 그 성운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끄러운 곡선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거칠고, 예측 불가능하게 뻗어 나가는 선이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른 차원으로 뻗어 나가는 형태. 사용자의 시선을 방해하고, 익숙한 예상을 배반하는 돌출부. 그녀가 몇 시간 전 실패라고 규정하며 지워버렸던 바로 그 형태였다.

그것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될 단 하나의 단단한 점이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불안정하게 타오르던 붉은 성운이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피어났다.

효율성과 안정성이 보장된 사회에서, 당신의 가장 독창적인 불온함은 얼마의 가치를 가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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