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의 단말기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경고는 아니었다. 붉은색이나 주황색으로 번쩍이는 위급 신호가 아니라, 일정 주기로 부드럽게 맥동하는 연초록색 빛이었다. 15년 전 오늘. 민준은 단말기를 들여다보지 않고도 그 알림의 의미를 알았다. 시스템이 ‘기념일’이라 부르는, 그러나 그에게는 낙인에 가까운 날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실의 공기는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온도 22.5도, 습도 44퍼센트. 천장의 환기 시스템이 24시간 내내 미세먼지와 알레르기 유발 물질을 걸러내고, 낮은 주파수의 백색소음을 흘려보내 심박 안정에 최적화된 환경을 유지했다. 국립 양자생체연구소(NQBI)가 권장하는 ‘고위험군 표준 거주 환경’이었다.
민준은 거실로 나갔다. 주방의 영양공급기가 아침 식사를 배출하고 있었다. 연회색의 걸쭉한 액체. 나트륨과 당, 카페인이 완벽하게 제거되고, 심장-뇌 동조율 안정에 필요한 미량 원소만으로 구성된 식사였다. 그는 10년 넘게 매일 아침 같은 것을 먹었다. 맛이라는 감각적 자극이 교감신경에 미치는 예기치 않은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매뉴얼대로였다.
창밖은 흐렸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봤다. 안전장치 때문에 창문은 15도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 틈으로 들어오는 바깥 공기는 필터를 거친 실내 공기와는 다른 냄새를 품고 있었다. 젖은 흙냄새, 희미한 매연 냄새. 시스템이 ‘오염원’으로 분류하는 냄새들이었다. 그는 잠시 그 냄새를 맡았다. 15년 전,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을 달리던 날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그날, 민준은 초등학교 계주 선수 선발전 결승선을 가장 먼저 끊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뛰었다.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만들어내는 격렬한 감각에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다음 날 체육 교사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 담임교사가 그를 상담실로 데려갔다. 책상 위에는 NQBI에서 온 얇은 데이터 시트가 놓여 있었다.
‘심장-뇌 양자동조 신호 불안정. 고강도 신체 활동 시 급성 심정지 발현 가능성 높음.’
그것이 그의 인생에 그어진 첫 번째 선이었다. 그 후로 수많은 선들이 더 그어졌다. 달리기 금지, 구기 종목 금지, 카페인 음료 금지. 감정의 진폭이 큰 영화나 음악도 권고 사항 목록에 올랐다. 그의 삶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의 목록으로 채워졌다. 시스템은 그것을 ‘보호’라고 불렀다. 위험을 미리 알려주고, 그 위험을 피해 갈 수 있도록 돕는 최첨단 의료 복지. 모두가 그 혜택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단말기가 다시 한번 진동했다. 이번에는 연초록색이 아니었다.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하늘색 빛이었다. 그는 단말기 화면을 켰다. 발신인은 NQBI 데이터 관리부였다.
[제목: 최종 안정성 프로토콜 v4.0 배포 안내]
[수신인: 서민준 (고유식별번호 QR7-2049-881)]
[본 프로토콜은 대상자의 위험도 곡선이 최고점에 도달하는 향후 12개월간 적용되는 최종 관리 지침입니다. 기존 ‘일상적 회피 매뉴얼’을 대체하며, 생존 확률 극대화를 위해 모든 권고 사항을 엄격히 준수해야 합니다. 첨부 파일을 확인하십시오.]
민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최종’이라는 단어가 눈에 박혔다. 그의 위험도 곡선은 태어날 때부터 완만하게 상승하다 20대 후반에 정점을 찍는 형태였다. 의사는 그에게 여러 번 설명했다. 이 시기만 무사히 넘기면 곡선은 다시 하강한다고, 그때까지만 조심하면 된다고. 이제 그 시간이 온 것이었다.
그는 심호흡하며 첨부 파일을 열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지침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전 매뉴얼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집요했다.
- 권장 심박수: 분당 60-85회 유지. 90회 이상 5분 지속 시 자동 경보 및 보호자 통보.
- 권장 이동 반경: 주거지 중심 5킬로미터 이내. 대중교통 이용 시 혼잡 시간대 회피 필수.
- 권장 식단: NQBI 인증 영양공급기 사용 의무. 외부 음식 섭취 절대 금지.
- 권장 미디어 목록: NQBI 심리안정위원회가 선정한 ‘그린 리스트’ 작품만 시청 가능. (예: 다큐멘터리 <빙하의 이동>, <이끼의 생태>)
- 금지 행위: 운전, 자전거 포함 모든 종류의 탑승 기구 직접 조작, 계단 2층 이상 빠르게 오르기, 타인과 논쟁하거나 감정적으로 격앙되는 모든 상황…
목록은 끝이 없었다. 그것은 삶의 지침이라기보다 생명 유지 장치의 사용 설명서에 가까웠다. 민준은 스크롤을 내리다 손가락을 멈췄다. 그의 눈이 한 문장에 머물렀다. ‘예기치 않은 동조율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과거의 격렬한 신체 활동에 대한 회상을 유발하는 모든 자극원을 제거할 것을 권고함.’
그는 고개를 들어 벽장을 봤다. 벽장 깊숙한 곳, 상자 안에 낡은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15년 전, 단 한 번 계주 선발전에서 신었던 운동화였다. 밑창은 거의 닳지 않았지만, 옆면은 흙먼지로 누렇게 변색된 채였다. 시스템은 이제 그의 기억까지 관리하려 들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뜬 이름은 ‘누나’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민준아, 프로토콜 받았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지혜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녀는 NQBI의 연구원이었다. 그를 관리하는 시스템의 일부이기도 했다.
“방금.”
“그래. 내가 미리 확인해 봤는데, 아주 잘 짜였더라. 앞으로 1년만, 딱 1년만 저대로 하면 돼. 그럼 네 동조율 곡선도 안정기로 접어들 거야. 힘든 거 아는데, 우리 조금만 더 참자. 응?”
누나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민준은 그 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 걱정이 쇠창살처럼 느껴졌다.
“이건… 사는 게 아니잖아.”
그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무슨 소리야. 이게 널 살리는 길인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관리 받고 싶어도 못 받아. 넌 운이 좋은 거야.”
“운이 좋은 거?”
“그럼. 위험을 미리 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니. 옛날 사람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병에 무방비로 당했어. 우린 아니잖아. 시스템이 널 지켜주고 있는 거야.”
시스템. 민준은 그 단어를 속으로 되뇌었다. 누나는 시스템을 신뢰했다. 시스템의 데이터와 예측이 곧 진리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시스템의 예측은 지난 수십 년간 99.7퍼센트의 정확도를 보이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냥… 가끔 궁금해. 예측이 틀리면 어떡하지? 내가 저 0.3퍼센트에 들어가면?”
“그런 생각 하지 마. 불안은 동조율에 제일 안 좋아. 매뉴얼에도 나와 있잖아. 긍정적인 생각하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프로토콜만 따라. 그게 제일 안전해.”
아무 생각 없이. 민준은 통화를 끊고 싶었다.
“누나.”
“응, 말해.”
“그때, 15년 전에. 내가 달리기 계속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지혜는 한숨을 쉬었다.
“민준아. 부질없는 소리 하지 마. 넌 그때 멈췄기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거야.”
“만약 그때 그냥 죽었으면….”
“서민준!”
지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에서 감정의 균열이 보였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다 널 위해서야. 알겠어? 이따 저녁에 들를게.”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단말기 화면은 다시 최종 안정성 프로토콜의 첫 페이지를 비추고 있었다. 민준은 화면을 한참 동안 노려봤다. ‘생존 확률 극대화’. 그 문장이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확률을 위해 현재를 지우는 삶. 죽지 않기 위해 살아 있음을 포기하는 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장으로 걸어갔다. 상자를 꺼내 낡은 운동화를 발밑에 내려놓았다. 15년의 먼지가 내려앉은 신발. 그는 허리를 숙여 운동화 끈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단말기를 봤다.
화면에 떠 있는 최종 프로토콜 파일.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파일 아이콘을 길게 눌렀다. 화면에 작은 메뉴가 나타났다. 공유, 이름 변경, 그리고 삭제.
민준의 손가락이 ‘삭제’ 버튼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손끝이 떨렸다. 이것은 단순한 파일 삭제가 아니었다. 지난 15년간 그를 옭아매던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시스템에 대한 반역이자, 자신의 운명을 건 도박이었다.
화면이 물었다. [파일을 영구적으로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작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는 창밖을 봤다. 15도 열린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진짜 세상의 공기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서 프로토콜 파일이 사라졌다. 단말기에는 텅 빈 배경 화면만 남아 있었다. 그는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복도식 아파트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맨발에 서늘하게 닿았다. 그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공간에 섰다. 엘리베이터를 지나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프로토콜은 엘리베이터 사용을 권장했지만, 그는 굳이 금지된 행위를 택했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무릎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사용하지 않아 퇴화한 근육의 비명이었다. 그의 단말기는 침묵했다. 아직은 모든 것이 권장 심박수 범위 내에 있었다.
1층 현관을 나서자, 회색빛 도시의 소음이 그를 덮쳤다. 자동차들이 낮은 소음을 내며 도로 위를 미끄러지고, 원거리 화물 드론이 상공을 가르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공사장 소음까지. 통제된 실내의 백색소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살아있는 소리의 홍수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불규칙한 파동을 느꼈다. 어지러웠지만, 동시에 살아있다는 감각이 뇌리를 때렸다.
그는 아파트 단지 벤치에 앉아 낡은 운동화를 신었다. 오래된 가죽이 발등을 낯설게 눌렀다. 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발이 기억하는 감각이었다. 15년 전, 흙먼지를 박차고 나가던 순간의 긴장감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일어섰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달려야 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걸었다. 보폭을 넓히자 단말기가 가볍게 진동하며 연초록색 빛을 띄웠다. ‘안정적인 신체 활동입니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십시오.’ 시스템은 아직 그가 자신의 통제 아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민준은 피식 웃었다. 그는 속도를 조금 더 높여 조깅을 시작했다. 관절은 여전히 삐걱거렸지만, 조금씩 기름칠을 한 기계처럼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단말기의 빛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경고: 심박수 상승 중. 분당 95회. 속도를 낮추십시오.’ 경고음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5분을 버티기 전까지는. 민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보폭을 더 넓혔다. 조깅은 달리기가 되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혀들었다.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갈비뼈 안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새 같았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15년 전 느꼈던 그 희열이, 고통의 표면 위로 기름처럼 떠올랐다. 그는 더 빨리 달렸다. 이제 단말기는 새빨간 빛을 뿜으며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위험! 심박수 임계치 초과! 즉시 활동을 중단하십시오! 보호자에게 관련 정보가 전송되었습니다!’
시끄러운 경고음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를 보듯 그를 피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의 손목에도 각자의 상태를 알리는 단말기가 초록색 혹은 하늘색 빛을 내고 있었다. 붉은빛은 재앙의 상징이었다. 민준은 그들의 동정과 경멸이 뒤섞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달렸다. 처음으로 그는 시스템의 낙오자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달리는 1명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폐부가 타는 듯한 통증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는 한강 변 자전거도로에 다다랐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단말기는 여전히 비상 경보를 울려대고 있었다. 곧 누나에게서 연락이 오거나, NQBI의 자동 긴급 출동 드론이 날아올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심장은 터질 것 같았지만,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죽음의 공포보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더 강렬하게 그를 지배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옆에 멈춰 섰다. 그림자가 그의 위로 드리워졌다. 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였다. 그녀는 운동복 차림이었지만, 손목에는 아무것도 차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리는 민준의 단말기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더니, 물 한 병을 내밀었다.
“처음이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주변의 소음을 뚫고 명확하게 들려왔다. 민준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여자는 씩 웃으며 자전거도로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울리게 두면 금방 잡혀요. 위치 추적 신호가 5분마다 갱신되거든요. 보통은 그 전에 드론이 먼저 오지만.”
그녀는 마치 일기예보를 말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민준은 혼란스러웠다. 이 여자는 누구지? 왜 나를 도와주려는 거지?
“누… 누구시죠?”
“그냥 지나가던 사람. 가끔 저렇게 시끄럽게 달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대부분 첫 질주에서 잡혀가지만.”
여자는 ‘질주’라는 단어를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하늘을 한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속도를 허락받는 기분, 어때요?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죠? 적어도 아직은.”
그 순간, 멀리서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빠르네. 당신 위험 등급이 꽤 높은가 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 여기 앉아 있으면 ‘보호’라는 이름으로 끌려가서, 다시는 문밖으로 나올 생각도 못 하게 될 거예요. 선택은 당신 몫이지만.”
민준은 여자의 손과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를 번갈아 보았다. 단말기는 여전히 그의 생체 신호가 위험하다고,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누나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시스템이 약속한 안전한 미래도.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눈동자에서, 자신과 같은 종류의 갈증을 보았다.
그가 여자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 그들 앞으로 NQBI의 흰색 비상 차량이 급정거했다. 차문이 열리고 누나인 지혜가 창백한 얼굴로 뛰어내렸다.
“서민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지혜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민준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녀의 시선이 민준 옆에 선 여자에게로 향했다. 지혜의 눈에 순식간에 적대감이 서렸다.
“당신… ‘언플러그드’군요.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이름 모를 여자는 지혜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당신 동생이 스스로 선택한 거죠. 자신의 속도를.”
민준은 지혜에게 붙들린 팔과, 여전히 자신을 향해 내밀어져 있는 여자의 손 사이에서 갈등했다. 1쪽은 그를 살리려는 세계였고, 다른 1쪽은 그가 살고 싶은 세계였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위험하게 뛰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그 박동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스스로 선택했다고요?”
지혜가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민준의 손목에서 여전히 붉은빛을 발하는 단말기에 고정되었다.
“이게 선택이에요? 시스템은 지금 민준이의 심장이 멈추기 직전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건 자살행위라고요!”
“시스템은 확률을 말하죠.”
여자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심장이 뛰는 건 확률이 아니에요.”
그 말은 민준의 가슴에 파문처럼 번졌다. 심장이 뛰는 건 확률이 아니다. 지난 15년간 그는 자신의 몸을 데이터의 집합으로, 관리해야 할 변수로 여겨왔다. 분당 심박수, 뇌파 동조율, 혈중 산소포화도. 숫자들이 그를 규정하고 그의 삶의 반경을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 갈비뼈 안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는 이 격렬한 고동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이자 희열이었고, 공포이자 생생한 삶 그 자체였다.
그는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절박한 얼굴. 그를 사랑하기에, 그를 잃을까 두려워하기에 그를 가두려는 사람. 그 사랑은 진실했지만, 그가 원하는 형태의 삶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혜에게 붙들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그 손을 뿌리쳤다.
“민준아…?”
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준은 처음으로 누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미안해, 누나. 근데 이게…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거친 숨소리에 섞여 겨우 나왔지만, 그 안에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실린 단단한 의지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몸을 돌려 이름 모를 여자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가요.”
여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고, 민준도 그 뒤를 따랐다. 뒤에서 지혜가 절규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NQBI 요원들이 차에서 내려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가까워졌다.
“이쪽으로!”
여자가 외치며 낡은 지하보도 입구로 몸을 날렸다. 어둡고 축축한 계단이었다. 프로토콜이라면 절대 접근조차 금지했을 공간. 민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그녀를 따랐다. 계단을 구르듯 내려가자 지상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축축한 벽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터널 안에 가득 찼다.
한참을 더 달려 반대편 출구로 나왔을 때, 세상은 완전히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온 곳은 낡고 복잡한 시장 골목이었다.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구역인 듯, 사람들의 손목에는 단말기가 보이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는 배달 드론 대신 사람들이 직접 물건을 나르고 있었고, 통제된 소음 대신 시끄러운 음악과 흥정하는 소리, 고소한 기름 냄새와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민준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손목의 단말기는 추적 신호가 끊겼는지 경고음이 멎어 있었다. 붉은빛만 기분 나쁘게 깜빡일 뿐이었다. 여자는 그런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근처 노점에서 김이 나는 꼬치 두 개를 사 와 하나를 건넸다.
“일단 먹어요. 영양공급기 맛은 아닐 테니.”
민준은 망설이며 꼬치를 받아들었다. NQBI 인증을 받지 않은 외부 음식. 그의 몸에 어떤 예측 불가능한 반응을 일으킬지 모르는 위험 물질.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짜고, 맵고, 뜨거웠다. 혀의 모든 감각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강렬한 자극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자극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텅 비어 있던 몸의 일부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꼬치 하나를 다 비웠다. 여자는 그런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 이름은 서린이에요.”
“민준입니다.”
짧은 통성명이 오갔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의 미래는 이제 NQBI의 위험도 곡선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생존 확률이라는 데이터 대신, 무한한 불확실성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서린이 골목 끝을 가리켰다.
“저길 넘어가면 시스템의 감시가 거의 닿지 않는 곳들이 나와요. 물론, 안전은 보장 못 하지만.”
안전. 민준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그는 안전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 그는 서린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낡은 운동화 밑창으로 전해지는 거친 아스팔트의 감촉이 생경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위험 신호가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는 회색빛 도시의 탁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시스템이 ‘오염원’으로 분류했던 매연과 먼지와 사람들의 냄새가 섞인 공기.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숨을 쉬었다.